아름다운 방랑자, 고갱

2020. 7. 4. 19:02예술

 

로뮤토피아는 고흐가 많이 집착했던 영원한 방랑자, 고갱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의 증권거래소에서 주식거래를 하기도 했고, 배를 타는 뱃사람이기도 했다. 고갱은 자신의 법적 후견인인 구스타브 아로자의 영향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갱, 바느질하는 수잔, 1880>

 

 

 

 

고갱은 '바느질하는 수잔'이라는 작품을 통해 화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즈음 프랑스 주식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자 고갱은 실직자가 되었고, 그림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고갱은 재능이 있었고, 운도 따라주었다.

 

고갱도 고흐와 마찬가지로 번민의 나날을 보냈고, 자괴감을 느꼈고, 그림을 통해서만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고갱도 고흐처럼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했고, 벼랑 끝에 내몰렸다. 고갱에게 남은 것은 그림뿐이었고, 그림은 고흐처럼 고갱의 삶도 구원했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의 비슷한 점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그림만 생각한다.

그림은 나를 낙심으로 몰아넣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다."

고갱

 

 

고갱의 혁명적 화풍과 자신감, 확신에 찬 행동은 그를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강렬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진정한 예술가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고갱의 작품은 평단으로부터 꽤 인정을 받고 있었고, 그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태평양의 마르티니크라는 섬으로 가서 짧은 체류를 한다. 그곳에서 체류했던 경험은 그에게 색채의 화려함과 강렬함을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된다.

 

 

 

<고갱, 열대식물, 1887>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고흐와 잠시 함께 지내게 된다. 이 동거가 그 유명한 '노란집'이라는 공동체 생활이다. 고흐와 고갱은 서로와 서로의 작품에 강렬한 호감을 가졌고, 함께 예술가로서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자화상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이한다.

 

 

<고갱, 레미제라블의 자화상, 1888>

 

 

 

<고흐, 폴 고갱에게 바치는 자화상, 1888>

 

 

 

그 후 고갱은 브르타뉴로 가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던 인상파 화가에서 추상을 추구하는 화가로 발돋움한다. 어느새 그에게는 자연을 그대로 작품에 옮겨오는 것은 자연을 베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누군가는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그의 예술적 개성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브르타뉴는 그에게 있어 원시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고갱은 더 원시적인 추상을 추구할 수 있는 열대의 환경을 찾기 시작했고 마다가스카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모순적이게도 고흐가 책에서 읽은 타히티에 대한 이야기가 고갱을 타히티로 떠나도록 결심하게 한다. 고갱은 마다가스카르보다 더 문명에서 떨어진 원시적인 곳을 원했다.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다.

그것은 원시적인 표현수단으로 밖에는

전달되지 못한다."

고갱

 

 

원시적인 자연은 점차 그의 내면으로 녹아들기 시작한다. 타히티는 그가 꿈꾸던 원시의 세계였다. 고갱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를 끌어당김을 느낀다.

 

 

 

<고갱, 이아 오라나 마리아, 1891>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타히티어로 '아베마리아'란 의미이다. 고갱은 성서를 남태평양식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투사한다. 타히티에서 작업한 고갱의 작품에는 성서의 여러 부분이 반영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그가 생활했던 지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톨릭 신자였다. 모순적이게도 고갱은 테하마나라는 13세 소녀와 지내며 에덴을 꿈꾼다. 어쨌든 그는 평화로운 시간을 이어나간다.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1888>

 

 

'마나오 투파파우'는 '저승사자가 지켜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타히티어이다. 고갱은 불 꺼진 방에서 엎드려 있는 테하마나를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혹자는 여성의 신체에 집중한 누드화로 평가하지만 고갱은 순결한 여인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타히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갱은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남은 돈은 4프랑뿐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작품으로 녹여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파리에서의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고흐를 포함하여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가고 없었다. 고갱도 고흐처럼 외로움을 느낀다. 고갱은 다시 프랑스를 떠나기로 한다. 그즈음 고갱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며, 매독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다시 돌아간 타히티에서의 생활은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그는 작품활동에 매달린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는 달랐고, 이 시기에 그는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죽기 전에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유언을 작품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8>

 

 

 

그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고갱은 그후 병마에 시달려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문명사회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원시의 사회에서도 완전하게 섞이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갇혀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다시 방랑을 시작했고, 그가 도착한 곳은 히바 오아섬의 아투오나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애인을 만났고, 유명한 '쾌락의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지막 작품활동에 열정을 다한다.

 

 

"새롭고 원시적인 영감의 원천을 가지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고갱

 

 

 

<고갱, 원시의 이야기, 1902>

 

 

 

1903년 5월 8일, 고갱은 그가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던 낙원, 에덴동산으로 떠났다.

 
로뮤토피아의 아름다운 방랑자, 고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로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보기>

 

www.youtube.com/watch?v=gQZ5d8Ooa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