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업
2020. 9. 23. 17:02ㆍ1분책
로뮤토피아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따뜻하게 엮어낸 '인생수업'이라는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사랑, 가족, 일, 관계...많은 것들이 떠올라 혼란스럽겠지만 단 한 가지만 고를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인생수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정신과 의사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5단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필연적으로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죽음의 5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협상), 우울, 수용(순응) 등이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죽음에 내몰리면 죽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다. 작가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그러한 인간의 기제를 사용하여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베로니카는 당연히 죽음을 시도했고, 죽음을 시도했던 사람은 또다시 시도할 것이기에 담당의사는 그녀에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차피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그 과정에서 삶의 신비를 배우게 된다. '인생수업'은 베로니카가 터득했던 것과 같은 삶의 신비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어차피 매일 반복되는 24시간을 되풀이해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그 삶에서 무엇을 해야만 할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가고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불필요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진짜 중요한 일들만 남는다. 그녀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삶에서 진실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우치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마무리를 앞두고도 삶의 의미를 끝내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고 배운다. 그것은 인간성의 아름다운 실현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고통, 상실, 실패를 경험하고, 때때로 헤매고, 마침내 어렵게 길을 찾은 이들이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돈, 지위, 완벽한 직업 등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을 계속 해왔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 종교, 신을 통해 답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정한 내가 없다. 세속적으로 부자가 되거나 강해진다고 해서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맞설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인생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인생의 깊이는 완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복보다 불행에 익숙한 이유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살기 때문이다. 삶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수업이다. 사랑, 행복, 관계는 우리가 배워야 할 단순한 진리이다. 누구의 삶에나 상실과 고통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이 성장하고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다. 완벽한 삶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외적인 조건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상과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미 대리석 안에 조각상이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주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우리 안에도 그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다. 우리 모두는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위대하고 특별한 무엇인가를 이미 가지고 있다.
퀴블러 로스는 평생 진정한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것을 '냄새 맡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경험을 통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진정성의 냄새를 맡는 예민한 후각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다다라야만 진정한 내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모습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에 따라서 연기도 곧잘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돌아보는 것을 잊고 산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양한 가면 속에는 부정적인 역할도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어둠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정이 아니라 수용이다. 그 어둠조차도 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독거려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아주 괜찮은 사람이 있다. 그는 늘 배려하고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긴다. 그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일까. 그에게는 늘 책임이라는 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줘야 하고, 분쟁을 해결해야 하고,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그러면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자신만 빠져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허망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하는 역할은 내가 아니다. 어깨의 짐을 내려놓아도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의무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일은 그만 해도 된다. 나는 슈퍼맨이나 슈퍼우먼이 아니다. 히어로는 영화로만 남겨두자.
우리는 왜 착한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그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다. 쓸모없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과하게 도와주고, 과하게 보상해주고, 과하게 신경쓰고...그러한 행동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의 갈구이다. 우리는 모두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존재이다. 불필요한 껍데기들은 벗어던지자.
"실존은 본질에 앞서서 간다."
사르트르
처음에는 상실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내가 해온 역할들이 내 삶을 채워왔기 때문이다. 역할의 가면들을 벗어던짐으로써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얇은 옷을 입은 진정한 내가 본래의 나임을 깨닫는 것이 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가치있다.
우리는 주변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하는 일이 잘 되고, 괜찮은 차를 타고,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면 나 자신이 굉장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은 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인간의 삶은 모두 그러하다. 역할의 껍데기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부자이든, 가난뱅이이든, 젊고 활력에 넘치든, 황혼을 향해 가고 있든, 관계의 시작과 끝에 있든 우리의 가치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한 어떤 존재이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로뮤토피아의 삶과 죽음,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로뮤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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