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0. 15:33ㆍ심리
우리는 죽음을 망각하고 터부시 하는 문화에 익숙하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 진부한 읊조림처럼 들린다.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자살환자, 자살충동에 빠져 생명을 끊으려는 사람, 심각한 자살생각을 품고 있거나 그것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적절한 수단을 찾고 있는 사람 등은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할까?
죽고 싶다는 마음의 중심에는 상실감이 있다. 공허함도 나 자신이 없다는 상실감이고,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허무함도 상실감이고, 관계에 치인 상처도 상실감이다.
심리학을 연구하는 루시 혼은 인간에게는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끔찍한 방향으로 틀어졌을 때 이 의지를 통해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인간은 명령어 하나로 프로그래밍하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는 잊히거나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묻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비밀의 방이 있다. 역경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감사함을 기억하는 것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연구를 통해 하루에 좋았던 일 세 가지를 생각함으로써 행복지수를 높이고 우울증을 줄이는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절망감에 빠져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세 가지를 떠올리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게 들린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단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이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해가 되는 일인지 내게 한 번 물어보자. 나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냥 놓아버리자.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시도가 필요하다.
누가 살아남고 누가 떠나는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은 모두 역경의 파도를 만나고 흔들린다. 당신이 살아있다면 어려운 시기를 겪었거나 겪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운명적 요소들이 만나 생과 사를 가른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가고 떠나간 자는 말이 없다.
인간은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위협과 약점을 먼저 보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유용하다.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과 삶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고통이 인간 존재성의 일부라는 사실에 공감하기 힘들다.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더라도, 고통이 전부 사라지지 않아도, 슬퍼하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왜 살아가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면 그냥 오늘을 살아보자. 어차피 내일은 또 오기 때문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죽음이란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뿐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를 헛되지 않게 해준다.”
프랭클
©로뮤토피아
※ 고 이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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